육서심원 六書尋源

육서심원은 대한大韓의 권병훈權丙勳이 펴낸 한자 해설서이다. 수편首編 2책과 나중에 추가된 보편補編 1책을 포함하여 모두 30책의 거질巨帙인데 누구라도 그 방대함에 먼저 놀라고 창의성에 두 번 놀라고 혼자서 반평생을 바쳐 이룩한 업적이라는 것에 또 감탄하고 말 것이다. 위당 정인보는 육서심원을 옛날 책처럼 만들면 무려 100책도 더 넘을 것이라 하였다. 실제로 쪽수도 10,000쪽 가까이 된다. 육서심원은 설문해자說文解字, 옥편玉篇, 자휘字彙, 강희자전康熙字典, 광운廣韻, 집운集韻 등 수많은 도서를 인용하여 편찬한 자학서字學書이고 췌획설贅劃說과 은의설隱意說 등 독창적 이론을 설파한 전무후무한 대저술大著述이다. 설문해자가 9,353자, 강희자전이 42,174자, 집운이 53,525자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 비해 더 방대하다.

권덕주는 그의 논문 "한국의 문자학"에서 말하기를, 원고의 글자 수가 무려 7백만자 이상으로 추정이 되는 바, 그 인용 자료(188종)의 풍부함과 정심精深함에 놀라게 되며, 한편 한자의 해설에 있어서 종래의 학설을 집대성하는 일에 그치지 아니하고, 문자 하나 하나에 저자의 독창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는 점에 주목하게 되며, 그 학설의 탁월함에 감탄하게 되는 것이라 하였다. 또, 육서심원의 고문古文 연구에 대한 공헌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뿐 아니라, 중국학계에서도 그의 학술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으니, 고故 둥쭤빈董作賓 교수는, "이른바 말뿌리語根의 탐색, 옛글古文의 연구는 앞으로 권權, 주朱, 심沈 3명의 책에 기대는 바가 클 것이다"라고 하여 청말 주준성朱駿聲, 심겸사沈兼士와 더불어 문자학연구에 쌍벽으로 추앙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김태수의 논문 "육서심원 고"에 따르면 육서심원은 주로 자형字形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모습形, 소리音, 뜻意 3요소가 내포된 우리 나라의 문자서이자 현전하는 체계화된 최대의 문자서로 중국의 설문해자에 비견될 만한 의미와 가치를 지녔다고 한다.

육서심원의 독창성

췌획설과 은의설에 대해서는 김진균의 논문 "육서심원에 대한 근대한문학계의 평가와 그 의미"를 인용하여 소개한다.

"董作賓이 소개하여 유명해진 예의 하나만 들어보면, 吉을 놓고 설문해자와 그 전통을 따르는 저술들에서는 士와 口의 결합으로 이해하여 선비의 입에서 나오는 길한 것으로 풀이하였는데, 육서심원에서는 十과 一과 口로 분해하여 열번 말할 것을 한번으로 줄여서 말하니 길한 것이라고 풀이하였고, 같은 의도에서 凶을 十과 凵로 분해하여 벌린 입으로 열 번을 말하니 흉한 것이라고 풀이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중략)
"厶의 경우 팔꿈치를 굽히듯 굽힌 모양으로서 끝에 달린 丶이 바로 췌획에 해당한다. 은의의 예는 이렇다. 隹는 본래 꼬리가 짧은 새를 본뜬 글자인데, 꼬리가 짧다는 것은 머리가 중요하다는 뜻이고 더 나아가 앞이라는 뜻이 숨어 있으므로, 바로 앞이라는 뜻이 은의에 해당한다. 그래서 金과 결합하여 머리를 내미는 송곳이란 뜻의 錐가 되고 辵과 결합하여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의 進이 된다는 것이다."
(중략)
"강희자전에서는 八部에 수록한 글자들 중에 共은 艹部로, 兵은 斤部로, 其는 甘部로, 具는 目部로 돌려놓은 것이다."
(중략)
"발음의 반절표기법의 경우도 예를 들면 夕은 日이 서쪽산에 가려 한 획이 사라진 형태여서 발음도 西域切이 된다든가 工은 사농공상 중에 사를 제외한 농공상의 가운데에서 위로 농민 아래로 상인을 두기에 二 가운데에 丨이 이어주고 있는 형상... 발음은 丨通切이라는 해석은 전적으로 권병훈의 상상력인 것이다."

성대惺臺 권병훈權丙勳은 어떤 위인인가?

권병훈은 1864년생으로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방화리(현 강서구 방화동)에서 태어났으며, 호號가 성대惺臺인데 애초 직업은 법관이었다. 권덕주에 따르면, 광무 9년(1905) 육군유년학교교관에 임명이 되었고, 다음해 광무 10년에는 6품 승훈랑에 승진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충남재판소 검사에 임명이 되었고, 융희 2년(1907) 8월 황해도 재판소 검사로 전보되었고, 같은 해 12월에 주임관 3등으로 승임되었고, 융희 2년(1908) 원산재판소 판사로 전임되었다가, 융희 3년 6월에 함흥지방재판소 판사로 다시 전임되었다고 한다. 바로 다음달 7월에 기유각서에 의해 나라가 사법권과 감옥사무마저 일본정부에 빼앗기는 국치를 당하자, 당시 함흥지방재판소 판사직에 있던 저자는 법복을 벗어던지고 공주公州로 내려가 변호사로 개업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이로부터 77세(1941)로 별세할 때까지 오직 육서六書의 연구에만 몰두하였다고 한다. 무려 30년이 넘는 반평생을 문자학 연구에만 전념한 것이다. 육서심원 서문에서 정인보는 이에 대해, "그 전후 준비하여 지내온 어려움을 더듬어 비유하면 길에 가시와 진흙이 곤란하게 하는 바요, 큰 산과 긴 강이 막는 바요, 여우, 요괴, 귀신이 아찔하게 하고, 바람이 세차게 불고, 비가 오며 칠흙같이 어두워 두려운 바이다. 뜻 있는 자들은 크게 탄식하며 혀를 내둘렀다. 만약 스스로 깨달은 것을 보존하지 않았다면 또한 얼마나 번거로웠겠는가. 그런데 다행히 선생께서 굳게 참고 극기하였고 또 기하산수에도 크게 통하였으며 동식물의 이치, 음양오행, 의약, 성력星曆, 복서卜筮, 산명算命에 이르기까지 또한 마음 속에 기억함이 많아 깊게 품을 도울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김태수 번역 인용).

육서심원의 험난한 편찬과정과 그 귀중함

육서심원의 초고를 마련하는 과정도 가시밭길이었겠지만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 그것을 출판하는 것도 만만하지 않은 일이었다. 인쇄에는 후일 서울대학교 총장이자 당시 중동학교 교장이었던 백농 최규동 선생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정인보는 육서심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선생께서 이 책을 씀에 원고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가운데는 매번 얇은 종이 서너겹을 취하여 사이에 기름 먹지를 끼고 각필로 그 위에 써 획을 깊게 그어 상하가 통하여 물들게 하여 이에 복사된 몇 본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몇 본에 또 첨삭하여 거의 두루함에 선생의 오른 손가락이 병이 나 아는 사람은 마음 아파하였다." 복사기를 쓸 수 없었던 시절에 먹지로 베끼는 방법은 단순 필사보다는 빨랐겠지만 손가락이 마비되는 불행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어 말하기를, "선생은 이미 더욱 나이가 들었다. 좌우에 쌓아놓은 것을 돌아보면 모두 초고가 어지러웠다. 그런데 다시 잘 쓸 수가 없은 즉 또한 스스로 마음 아파했는데 요즈음 선생께서 한성에 이르러 중동교장 최규동군을 만났다. 최군은 원래 소학에 마음을 두고 있던 중 선생께서 자의를 설함을 듣고 곧 이에 마음을 기울였다. 얼마 후에 그 책이 아직 초고를 옮기지 않았음을 듣고, "슬프도다! 일생을 덮어 고고枯槁의 학문을 어렵다 아니하였는데 또 장차 홀로 얻은 것이 없어져 초목의 썩음에 따를 것이니 이는 아울러 세상 사람의 책임이도다"라 하고 이에 선생에게 학교의 방을 주고 서수書手를 고용하여 쓴 것을 받아 또 이를 인쇄함에 무릇 6년이 지나 일이 끝났다." 하였다(김태수 번역 인용).

권덕주의 논문에 따르면, 중동학교에서 6년이 걸려 간행한 책은 30질에 불과하였고, 1971년 현재 국내대학(서울대학, 고려대학, 연세대학, 동국대학, 대전대학)과 중앙도서관에 각기 1부씩 기증되어 있고, 해외로는 자유중국의 대만대학, 일본의 덴리대학天理大學, 미국국회도서관에도 기증되었으며, 그 외 몇 나라에도 보내졌다고 한다. 국회도서관 기증본에는 기증자가 전 중동학교 이사장인 최성장崔性章으로 나타나 있다. 경향신문 1962년 6월 2일자 기사에 따르면 최성장박사가 육서심원 1질을 일본 덴리대학 학생부장 이시하라(石原六三)교수에게 전했다고 하는데, 지금 덴리대학 중앙도서관 장서 검색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에 일본국회도서관이 육서심원을 소장하고 있는 것은 확인된다. 전세계적으로 단 30질밖에 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시민이 육서심원을 실제로 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1983년에 경인문화사에서 영인본을 출간하였으나, 이 역시 한 질 600,000원이라는 고가와 30권의 부담스러운 분량때문에 별로 팔리지 않았는지 곧 절판되고 말았다.

일예연구소 一藝硏究所

상기한 김진균의 논문은 이렇게 끝난다. [근대한문학의 존재는 한동안 잊혀졌으며, 중국문자학의 계보에서 돌출하여 근대한문학으로부터 독창성을 인정받은 육서심원도 최근까지 관심의 사각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변영만이 권병훈에게 "엎드려 생각건대 사문斯文이 장차 끊어진다면 그뿐이지만, 진실로 그렇지 않다면 하늘이 선생을 태어나게 한 뜻을 알겠습니다."라고 한 거대한 칭송은 지금의 우리에게 착잡한 울림으로 전달되고 있는 듯하다.]

이제 누구라도 집에 앉아서 육서심원을 열어볼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하고 일예연구소라고 이름 붙였다. 권병훈선생이 지은 육서심원의 원래 이름 "일예보一藝譜"에서 딴 것이다. 먼저 한자의 자원풀이가 궁금할 때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육서심원 색인편을 참조하여 강희자전식 부수 색인을 마련하였다. 그 다음 목표는 색인편의 낱자 하나하나를 모두 입력하는 것인데 누구나 이 작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체계를 세웠다. 이것이 끝나면 색인편과 본문을 대응하여 수록 글자를 정확히 파악하고 본문 입력에 착수하여, 궁극적으로는 성대惺臺 선생의 강왈講曰 부분을 우리말로 모두 국역하고자 한다. 그러나 너무나 큰 일이라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육서심원은 권병훈 선생이 인생을 바친 역작이기는 하나, 소수 현학자가 그 열매를 독점하고 있는 현실이다. 대중이 관심을 가져야 비로소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우리 민초의 꾸준한 관심이 중요하다. 육서심원이 도서관 서고에서 잠자는 낡은 책이 아니라, 이제 다시 조명을 받아 찬란한 빛을 내뿜는 보물이 되기를 소망한다.